
수지가 영국 워킹홀리데이(워홀)을 떠나기 며칠전 서둘러 서울로 딸의 짐을 실러 아내와 서울에 며칠 묵게되었다. 여러번 서울에 올라 왔지만 용무만 보고 그냥 내려 가기 일 수였고, 사실 딸 아들이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올 때마다 서울구경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주말을 이용한다던가 공휴일 아니면 직장인들이 어디 쉽게 날을 빼낼 수 없는 입장이다 보니 여유롭게 서울 구경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이번에는 자유로운 백수의 몸이 되다 보니 평일이나 휴일이 같은 하루이다 보니 쉽게 날짜를 잡을 수 있고 언제든지 달려 갈 수 있었다. 수지 워홀을 계기로 가족이 모여 조촐한 점심을 함께 먹을 수 있었고, 여유롭게 시간에 쫒기지 않고 여유를 즐긴다. 카페에서 커피랑 음료를 한잔씩 하면서 그간의 회포를 풀고는 아들은 자기 아지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눈치다. 남자들이란 특히, 경상도 사나이들이란 가족에게 나긋나긋한 면은 없지만, 그래도 모처럼 시간을 함께 할려면 반나절은 보내야 하거늘, 무뚝뚝한 아들을 돌려 보내고 3명이서 남산 타워로 가보기로 했다.
마을버스를 타고 남산입구에서 내려 걸어서 타워까지 가기로 했다. 도로를 포기하고 산속으로 나있는 산책길로 선택한다. 마침 거길 올라가는 한 일행을 따라 올라 갔다. 빙빙 돌아가는 느낌이 들고 가파른 언덕과 돌아 돌아 가는 지름길 처럼 여겨지지 않는 오솔길을 따라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 오른다. 낙오자도 발생한다. 생각보다 많이 올라 간다고 생각할 즈음에 산성으로 보이는 돌담이 나타나고 거의 다 올라 온듯 보인다. 외국인이 길을 물어 오는 데, 처음에는 잘 알아 듣질 못한다. 서쪽 터널을 묻는 것 같은 데, 우리도 이방인이고 지리를 모르니 난감하다. 케이블카 타는 곳과 버스타는 곳을 물어본다. 남산에 케이블카가 있는 지, 나는 모르는 전혀 사실을...
하는 높이 우뚝 솟은 타워가 나타난다. 밑에서 보니 장관이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적당히 많다. 그래도 내국인 외국인들이 뒤섞여 무리지어 오르고 내려간다. 수지 얘기로는 일요일 치고 사람들이 적은 편이란다. 내눈에는 많은 데 말이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 보이고 멀리 롯데 타워가 보이고 눈을 스치 듯 지나가면서 문득 청와대가 보이고 인왕산 북한산 등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 온다. 사진 몇 장을 찍고는 금방 풍광에 식상하고 벤치 신세가 된다. 벤치에서도 서울 풍광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어서 좋다. 저 수많은 집들 중 내집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언젠가는 그럴 날이 반드시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꿈꾸며 하행선 버스에 몸을 싣는다.

다음날 집사람과 둘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예전에 학생들을 데리거 온적이 있지만 구석구석 훝어 보기가 쉽지 않다. 큰 규모의 박물관이다 보니 꼼꼼히 살펴 보기가 쉽지가 않다. 1층 선사시대부터 근현대 유물관을 모두 보는 데는 하루 종일 보아야 할 진데, 겨우 1층의 우측면만 보니 식상하다. 문화재에 대한 욕구가 예전 만큼 불타오르지 않는다. 입구에서 안으로 깊숙이 들어 오니 눈에 시원하게 솟아 있는 탑이 하나 있다. 높이는 3층을 넘어가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 갔다가 다시 돌아온 경천사지 십층 석탑이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이 해외로 유출 된 것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 가 하루 빨리 우리나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경북도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안내하는 방송을 들은 적이 있다. 모든 문화재가 박물관이 아닌 현장에서 잘 보존 되는 것이 더 실감 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다음날 북촌으로 갔다. 서울에 온 김에 서울 구경을 싫컷해 보기로 했다. 입구부터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 이들을 마주한다. 내국인 보다는 외국인의 수가 더 많다. 코로나 엔데믹이 되고 나서 외국인들이 물밀듯이 들어 오고 있다. 북촌 거리 구석 구석 마다 외국인들이 가득하다. 일반 가정집으로 보이는 곳에는 들어 오지 말라는 글귀와 조용하라는 안내판이 쓰여 있고 알바생으로 보이는 자봉 청년도 보인다. 서둘러 한바퀴를 돌아 보고 나오니 벌써 지친다. 집사람은 앆부터 찬덕궁을 노래한다. 근처에 표지판이 보이는 데 찾을 수가 없다. 발길을 돌려 운현궁으로 향했다.

대원군이 거쳐하던 곳으로 비교적 넓은 구구칸의 규모를 연상할 수 있다. 도심에 있어서 궁궐에 드나들기도 용이한 곳에 터를 잡고 있다. 북촌 보다 오히려 전통 가옥의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민가가 아니고 왕가에 버금가는 곳이니 으리으리하게 꾸몄으리라 생각 된다. 구석 구석 건물과 방들로 사랑채와 여러채의 안채를 둘러 보고 나오니 점심때가 훌 쩍 지난다. 운현궁 맞은 편에 있는 운현궁 설렁탕집이 맛집이라 소개 한다. 시장이 반찬이고 보니 설렁탕도 달고 맛나다. 잠시나마 피로감이 사라진다.

힘을 내어 창덕궁으로 향한다. 날씨가 여름으로 치딛는다.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1405년(태종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광해군 때에 재건된 창덕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이상 문화재청 소개 자료)
수지가 영국으로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부터 용문 시장으로 가서 김밥 세줄에 커피와 아이스 크림 등등을 사서 집에서 조촐하게 아침을 먹다. 목이 메는 지 수지는 김밥 한즐을 다 못 먹고 있다. 어라 김밥 킬러 아내는 수지가 남겨 놓은 김밥을 침범하다. 나의 꽁지 김밥 까지도 싹쓸이하다. 꾹꾹 눌러 담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인천 공항으로 향한다. 비탈길을 내려오는 데 내가 끌어도 무거운데, 수지가 끌기에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연습삼아 끌어 본다는 수지도 컨트롤이 잘 안된다. 큰일이다. 전철을 갈아타고 이민 보따리를 끌고 환승해서 마침내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도착하자마자 캐리어의 무게를 달아 본다. 25킬로그램을 왔다 갔다 한다. 백팩의 무게도 7킬로 그램 내외다. 수화물은 통과다. 드뎌 이별의 시간이다. "돈걱정 말고 안전이 우선이다."라는 말이 울음보의 폭탄을 터뜨린다. 수지가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리고 집사람도 봇물을 터뜨린다. 이거 참 난감하고 난감하네. 입국심사대로 들 가는 수지의 뒷 모습이 짠하다. 시집보내는 딸과 같은 마음이 든다. 2년이란 시간은 금방 가지만 지금의 이별은 너무도 길고도 긴 시간의 터널에 갇힌다. 아내는 안보겠다고 대기실 의자로 가버린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눈물 짓는 수지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주고 싶다. 검색대로 향하면서 마지막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집으로 돌아 온 아내는 눈물을 멈추지 않는다. 딸아이의 짐을 정리할 때도, 청소를 할때도, 짐을 차에 실을 때도, 집에 돌아와서도 멈추지 않은 눈물은 언제 마를 지 모르겠다. 마음이 착찹하고 서글프다.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