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어둠이 지배하는 새벽녘이다. 보름달을 한 입 베어 먹은 달이 서쪽 하늘에 훤히 내걸려 있다. 달무리 지는 하늘엔 찬바람이 불어 한기가 온 몸을 감싸안으며 무거운 발걸음이 종종걸음으로 바뀐다. 그 시각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꽃만이 아니다. 시계보다 정확한 아침형 사람들이 오늘도 그 시각 그 자리를 메꾸고 있다. 동백들이 세대교체를 하듯이 지는 꽃과 피는 꽃이 서로의 역할을 인수 인계하듯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매일 동백을 바라보지만 싫증이 나질 않은 것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싫증이 나지 않듯이 매일 먹는 밥이 물리지 않듯이 동백도 이제 겨울의 주식량이 되어 가고 있다. 그식량이 주는 영양분을 매일 매일 우리는 섭취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울음으로 붉게 물들었다가 한떨기 꽃잎을 떨구고 어느새 돋아난 꽃봉우리를 바라보게 된다.
어느 덧 마지막 한주가 시작이다. 삼십여년 동안 한 우물을 팠으면 뭔가 이루어야할 게 많겠지만 돌이켜 보면 그렇게 이룬 것도 없다. 그 많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 왔는 지 그리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려 왔지 뒤 돌아 보며 하루를 정리하고 반성하며 내일에 대한 뚜렷한 설계를 할 시간이나 여유 조차 가지지 못한 지난 세월이 아쉬움과 후회의 시간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 일까? 현실에 만족하고 지금 이 순간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달려 왔건만 정작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잡을 수 없는 추상적인 성과 만이 남아 있겠지......
아침 일찍 원어민 교사 메튜 선생님이 찾아 왔다. 지난 주 점심시간에 나란히 줄을 서서 얘기하다 다음주 방학식에 비공식적인 퇴임식을 겸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평소에 시간을 칼같이 지키고 비교적 출근 시간이 늦은 메튜가 아닌가 그런데, 8시를 막 넘어 누가 문에 노크를 한다.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이는 바로 메튜가 아닌가 손에 쇼핑백에 고유차들로 꾸려진 전통차 상자를 들고 왔다. 특유의 잘생긴 환한 미소와 함께 그 쇼핑백을 나에게 매민다. retirement gift란다. 참 예의 바른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가끔 내방에서 산국차를 한잔 하면서 그 간에 있었던 일들을 잘 얘기해주는 메튜가 아닌가, 잘생긴 외모에 성격도 매우 밝은 친구다. 겉보기엔 내숭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얘기를 해보면 거침없이 막힘없이 말을 잘한다. 물론 한국 말도 수준급이다. 얼마전 한국어 시험에도 응시하였다는 말씀.....
메튜와의 인연은 지난해 같은 학년을 하면서 1학년에 두개반을 영어회화시간으로 함께 수업을 진행한 것이 인연이 되어 올해도 우리 학교에 신청하여 1년을 더 수업하게 되었다. 물론 올해는 coteacher가 바뀌었지만 그래도 만날 때 마다 그리고 페북이나 인스타에서 서로 소통하고 있지만 만날 때 마다 한상 밝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잘생긴 사람은 성격도 밝다.
꽃차 한잔으로 퇴직 후의 일상에 대해서 얘기를 주고 받고 메튜의 겨울 방학에 스케줄을 들으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아침 시간은 항상 바쁘게 흘러 간다. 오늘도 마의 월요일이다. 주말에 쉬고 온 친구들이 유독 월요일이면 지쳐 쓰러져 있다. 얘들이 직장에 다니는 셀러리맨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 이들이 받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으리라. 다시 마음의 끈을 동여 매고 전장으로 나가는 장수 처럼 무장을 갖추고 마지막 한 주를 마무리 하러 출동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