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3박 5일의 싱가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투어를 다녀와서

문응서 2009. 4. 8. 13:54

3박 5일의 싱가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투어를 다녀와서

(참가자 : 교장 샘, 권정옥, 김상옥, 김창준, 문병철, 정한구, 고태훈, 강성수, 임창완, 박승현, 이훈, 황혁주, 박혜정, 이미라, 김소림, 주권식)

  1월 29일(목) 9시에 부푼 마음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집사람이 남양동 버스터미널까지 배웅해 줘서 예상보다 빨리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항리무진 표를 사서 정류장으로 나오니 이미 황혁주, 김소림 샘이 도착해 있었다. 곧 바로 리무진 버스가 와서 차에 올랐다. 송부장 샘과 권단장님이 이미 버스에서 미소로 맞아 주신다. 단장님의 가방이 의외로 간단하다. 심플하게 떠나기로 했단다. 좋은 생각......30분이 채 안되어 김해 공항에 다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십 여분씩 단축되는 느낌이다. 경제가 어려워서 그런지 의외로 공항엔 사람들이 많질 않구나. 20분 간격으로 버스가 닿을 때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타난다. 10시가 조금 넘어 교장 샘까지 도착완료다. 노랑풍선 여행사 직원과 만나기로 한 지점엔 아직도 여행사 직원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얼마 후에 김창준 팀장 샘을 끝으로 집합 완료된 후로 여행사 직원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싱가폴로 곧장 수화물을 부치기로 했다. 보안검색대를 거쳐 세관을 나와 김포로 향하는 낮12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참 여행1호 해프닝은 교장샘이다. 교장 샘이 구여권을 가져오는 바람에 집에 사모님이 신여권을 가지고 부리나케 달려오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시간 여유 있게 움직인 게 다행이었다. 1시경에 김포에 도착했다. 리무진으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아직도 설렘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미지의 세계처럼 다가옴은 어인일일까?

  인천공항에 다시 발을 디딘지 3년 만에 다시 찾았지만 이 곳이 어딜 가겠냐만은 예전 그대로이다. 아직도 가슴 한구석엔 5년전 호주로 떠나던 그날과 2년전에 홍콩으로 떠나던 날들이 다시 추억으로 떠올라 감회가 새롭구나...... 일행들이 삼삼오오로 나뉘어 고박사와 정박사, 임지단과 필자는 위층 한식당으로 올라갔다. 각자 자기입맛에 맞는 식단을 꾸려 앉았다. 정박사와 나는 중식인 짬뽕밥을 시켰는데 얼큰했다. 이제 이런 얼큰한 맛도 느끼한 입맛으로 바뀔 시간이 곧 다가올 것 같다. 임지단이 휴대폰을 로밍 하고난 후 우리는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왠지 공항 로비가 내외국인들로 붐비던 5년 전의 그 많던 사람들이 오늘은 왠지 썰렁해 보임은 요즘 경기를 말해 주는 것 같구나.

  드디어 4시 싱가폴 창이로 향하는 대한항공 KE641편에 몸을 실었다. 6시간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구름위를 나르고 있다. 기내 스크린에는 우리 비행기가 향하는 방향과 속도, 도착예정 시간 까지 상세하게 그려놓고 있단다. 승무원의 안내 방송과 캡틴의 중후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가운데 우리의 愛機는 흰 구름과 푸른 바다를 멀리 두고 평온한 날개 짓을 하고 있다. 옆자리에 앉은 임지단은 벌써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 건너편 옆자리엔 얼굴이 차이나 풍의 젊은 아낙이 어린 아이 하나를 데리고 우리와 동행하고 있다. 내가 중국계나 인도차이나계 같다고 하자 입을 뾰루뚱 내밀었다. 실은 경기도 파주에 산다는 한국인이다. 싱가폴에 있는 언니 집에 다니러 간다나. 임지단이 중간에서 이것이 임지단에겐 그 아줌마의 대화를 이어가게 했단다, 경기도 파주 댁이라는 아이는 노트북을 통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눈망울도 똘망똘망하게 생긴 녀석이 연신 영어 단어를 조그마한 입으로 내 뱉자 임지단은 아예 그 꼬마를 품에 안고 난리법석을 뜬다. 임삼촌의 내면에 잠재 되어 있던 끼가 되살아난다. 유난히도 외국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록시 록시 임지단의 활약이 내심 기대된다. 심천, 마카오 그리고 홍콩에서 옥편하나로 여행을 한방에 끝내주었던 우리 임지단이 아닌가...

  여기 또 한분이 계신다. 연신 비행기 앞뒤를 무료한 듯 오락가락하는 분이 계신다. 우리 교장 샘이다. 우리 보다 앞 칸에 자리를 잡고 계셨는데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금단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얼마나 버티실지 사뭇 궁금하다.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먹었다. 비좁은 밥상이지만 있을 건 다 있고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저녁이다. 포도주에 맥주를 몇 잔해서 그런지 술이 약간 오르는 게 기분이 꽤나 업 되고 있다. 어느덧 비행기는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기내에는 다소 열기가 느껴질 정도다. 기내방송을 통해 곧 비행기가 창이 공항에 도착한단다. 출발 전에 싱가폴 세관이 까다롭다는 사전 교육에서 일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온다. 여기도 여행객이 줄었는지 세관을 통과하는 여행객들의 줄이 그다지 길지가 않다. 입국장을 빠져 나오니 현지 가이드가 우리 일행을 반겨 맞아 준다. 마른 체구에 아담한 사이즈의 몸집이다. 9년간 싱가폴에 몸담아 왔단다. 버스는 말레이시아 조호바루(JOHOR BAHRU)로 향한다.

  조호르 수로를 사이에 두고 싱가폴과 접경인 조호바루는 마치 창원과 마산처럼 서로 인접해있다. 그래도 국경을 달리하니 입출국 절차를 꼭 거쳐야 한다. 싱가폴과 말레이시아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하루에 10만 명 이상 이라하니 과히 놀라운 일이다. 매일 이들은 자동차로 버스는 승객을 내리고 다리하나를 건너서 세관을 통과한다. 매일 입국과 출국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이들은 큰 불평 없이 매일 입출국을 한단다. 우리도 버스에 짐을 두고 몸만 내려 말레이시아로 들어갔다. 조호바르는 인구 200만명으로 말레이시아에서 3번째로 큰 도시란다. 대부분의 인구가 회교도란다. 4,50여분을 달려 푸테리 퍼시픽 호텔(PUTERI PACIFIC HOTEL)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서니 웨이트들이 어서오세요라고 우리말을 지껄인다. 숙소 배정을 마치고 룸메이트인 고박사와 방으로 올라갔다. 벌써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다. 이곳은 우리보다 1시간 늦단다. 가이드가 내일 일정이 빠듯하다고 일찍 자야한다고 신신당부를 한다. 우리 캡틴은 일단은 가볍게 한잔할 테니 9**호로 모이시란다. 가볍게 싸워를 하고 캡틴 방으로 갔다. 벌써 소주 몇 병이 방바닥에 쓰러져 있다. 우리가 확보한 소주가 40병 정도다. 이곳은 회교도 국가이니 술을 구입하기가 쉽지가 않단다. 소주 한 병이 10달라 넘으니 구하기도 힘들고 아예 적당히 마실 수밖에요. 첫날이라 그런지 일찍 끝이 난다. 1시를 조금 넘겨 방으로 다시 건너왔다. 적당한, 아니 턱없이 부족한 알콜을 몸에 소지한 채로 ......

  멀리서 닭 울음 대신 회교도들의 예배소리인지 노래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잠결에 낯선 음이 선잠을 깨운다. 벌써 고박사는 기침을 하여 싸워 실로 향한다. ‘룰루루.....’ 특유의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콧노래소리가 묘하게 어울어 진다. 오늘은 아침부터 서둘러야한다. 아침엔 인근의 회교도 사원과 깜풍 마을로 간단다. 조호바루는 싱가폴에서 25,6킬로 떨어진 말레이 특급이 연결되어 있는 철도와 도로로 연결 되어 있단다. 1855년 술탄, 아부 바카루에 의해 건립 되어 왕국과 회교사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회교사원을 처음 접하니 나름대로 호기심과 경외로움이 일어난다. 이국적인 정취와 난생처음 접하는 회교도 사원의 설명이 귀에 쉬 들어오질 않는다. 가이드 곁을 떠나 사원 건물을 사진에 담고자 분주히 디카를 눌러 됐다. 아직 손가락 끝에 작품다운 그림이 나타나질 않는다. 깜풍 마을로 향하던 중 회교도들의 묘지를 지나게 되었다. 왕족묘지와 일반 서민들의 묘지가 구분되어 있고 직사각형에 두개의 기둥모양의 장식을 꽂아 두었다. 크기는 신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왕족들은 웅장하게 건물을 지어 사후에도 신분이나 재력에 따라 들어갈 땅이 구분되어 있었다. 캡틴 옆에 있던 권단장님은 묻힐 땅도 없단다. 왜냐하면 빚이 삼천 오백만원이니 묘지를 살 땅도 묻힐 곳도 없어 폐기처분된다고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내심 마음에 걸렸다.

  묘지를 돌아 나오니 바로 인근에 민속 마을이 있다. 말레이시아 전통 춤과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악기는 대나무를 여러 개 아래로 늘어뜨려 손으로 하프를 키듯 특이한 소리를 낸다. 민속춤이 끝나자 관객 중에 몇 사람을 뽑아 무대위로 데려가서 함께 춤을 춘다. 우리일행 중엔 훈남 이훈 샘이 뽑혀 올라갔다. 얼굴도 허옇게 잘 생겼고 춤도 곧장 잘 춘다. 같은 건물 내에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열대과일을 말려서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깜풍 민속 마을을 나와서 싱가폴로 향한다.

  올 때처럼 말레이시아에서 출국 수속을 싱가폴에서는 입국 절차를 거쳐 하루 만에 다시 싱가폴로 돌아 왔다. 점심을 몽골이안 바비큐 식당으로 갔다. 소고기와 닭고기를 선택하면 주방에서 일률적으로 뽁아 준다. 요리사들이 서넛 철판 주위에 둘러서서 우리가 선택한 음식을 그 자리에서 구워 다시 접시에 담아 준다. 받아보니 닭고긴지 소고긴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먹고 보자. 먹을 만 했다. 고추장을 듬뿍 바르니 한결 입맛에 와 닿는다.

  점심식사 후에 새들의 공원인 주롱 새 공원으로 향했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인상적인 조류 사육장인 주롱 새 공원은 관람객의 구미와 즐거움을 동시에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600여종의 8000여 마리의 아름다운 새들이 거대한 울타리 내에 서식하고 있다. 원형극장에서 펼쳐지는 플라밍고, 마코, 무소새와 앵무새들의 쇼는 재미있고 흥겨운 볼거리다. 팽귄 퍼레이드 구역은 남극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5종류의 200여종의 팽귄과 50여종의 바다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색깔이 화려한 큰 부리 앵무새와 코뿔새,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적도 부근 정글에서 온 100여종의 새들도 있다. 모노레일을 타고 10여분 동안 공원을 둘러보았다.

  공원을 나와 도심으로 차를 달려 싱가폴 시내에 있는 북 선착장에 있는 머라이언 상이다. 스템포드 래플즈 경(sir Stamford Raffles)이 처음 상륙한 지점인 이곳은 강변 휴게실과 주위 고층 건물들이 즐비해 있는 도심지 내의 공원으로 이 동상 건너편에는 오페라 하우스 극장과 그 옆에 우뚝 솟은 쌍용이 지은 200여 미터 높이의 고층빌딩도 눈에 들어온다. 머리는 사자모습을 그리고 몸은 물고기 모양의 인어 모습으로 부귀와 싱가폴의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물의 입에선 연신 물줄기를 내뿜고 있다. 그 상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다시 시내의 시청 맞은편에 있는 도시 재개발 센터(URAC)로 가서 싱가폴의 어제오늘 그리고 내일을 모형으로 제작한 청사진을 담은 구조물을 둘러보았다  싱가폴도 창원처럼 계획도시로 짜임새 있게 잘 구성되어 있다. 비록 짧은 역사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보존하여 오늘보다는 내일을 더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도 그 소중한 유산들이 아깝게 사라져가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시 갤러리 센터를 나와 인근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도교 사원을 방문했다.

싱가폴의 경제를 주도하는 화교들이고 보면 중심가의 요지나 상권을 두루 장악하는 것은 당연하다. 홍콩에서 보던 것처럼 향불을 들고 기원하는 이들에게서 복을 빌고 내세를 기원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겠다. 가이드의 설명에 귀 기울이고 호기심을 갖고 꼼꼼히 둘러보는 미국인들 틈바구니 사이로 전투적으로 돌아다니고 走馬看山을 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모든 관광을 10분 이내로 후딱 해치우니 말이다. 들어가는 우측 편에 바다의 해신을 모시고 있고 가운데에 주신이 모셔져 있다. 주위의 차이나타운은 18세기 초 스템포드 래플즈경에 의해 싱가폴이 건국 되었을 당시 중국계 싱가폴 사람들에게 서남부 지역을 내어 주었고 이들이 각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벌이며 그 영역을 넓혔다. 오늘날 싱가폴 차이나타운에 보존된 건축물과 상징물들이 중국문화와는 대조적인 종교적 건물들은 그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계 싱가폴 주민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데 이는 차이나타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가장 오래된 힌두사원이 그 증거라 볼 수 있다.

  다시 버스에 올라 우리는 동양최대의 열대 식물원인 싱가폴 국립 식물원인 보타닉 가든으로 향했다. 시가지는 인공적으로 가공이 된 느낌이다. 정책적으로 나무를 심고 녹지 공간을 일구어 푸른 도시 푸른 숲을 가꾸려는 노력이 엿 보인다. 차도 위나 거리에는 땜빵 자국인 껌 자국이 없는 유일한 나라이고 보면 도시 전체가 깨끗하기 그지없다. 물론 어딜 가나 쓰 잘데 없는 껌 씹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 좋다. 30여분을 달려 식물원에 도착했다. 12만평 규모의 방대한 넓이를 다 둘러 볼 수 없으니 다음 일정을 생각하여 일부만 둘러보기로 했다. 군데군데 큰 고목들은 유산나무(heritage tree)로 지정 되어 있어 나무 한 그루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볼 수 있다. 식물원을 나와 시내에 있는 면세점으로 쇼핑을 나갔다. 오차르 로드는 싱가폴의 중심으로 현대적이고 화려한 대규모 쇼핑 센타들이 약 2킬로 미터 구간에 걸쳐 늘어서 있다. 우리가 간 곳은 갤러리아 면세점이었다. 들어가는 입구가 에스카레이트로 4층까지 곧 바로 이동하고 내려올 때는 층마다 들릴 수 있게 한다. 이들의 상술을 읽을 수 있다. 층 마다 세계적 명품 브랜드로 꽉차있다. 쇼핑의 나라답게 그에 걸 맞는 명품들이 즐비하다. 1층까지 내려오면서 진열된 모든 상품이 우리의 눈길과 구미를 당기지만 우리의 주머니 사정에 맞게 구입할 만한 물건들은 눈에 띄질 않는다. 1층까지 그냥 윈도우 쇼핑으로 그냥 지나쳤다. 남의 물건을 쳐다보듯 말이다. 1층엔 제법 구미를 당기는 기념품이나 저가의 물건들이 우리를 유혹한다. 쇼핑은 20분이 채 되지 않아서 끝나버린다. 하지만 캡틴께선 한 아름을 안고 나타나다. 바로 바틱(Batik)이라는 전통문향을 새겨 넣은 옷이란다. 이 옷은 싱가폴에서 열렸던 APEC 정상회의 때 각국 정상들이 입었던 옷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싸다고 해서 단체로 한 벌씩 구입하라는 충고도 아끼지 않으신다. 이미 시간은 늦어 버리고 바탐에서 돌아와 시간을 내어 다시 바틱을 구입하러 오기로 했다.

  바탐 섬으로 가기위한 페리 선착장으로 갔다. 바탐이 인도네시아 영토이니 다시 출, 입국 수속을 받아야했다. 여권엔 온통 도장으로 도배를 하고 있다. 얼마 전에 마라도로 가면서 심하게 배 멀미를 한 악몽이 떠오른다. 창 밖으로 배가 흔들리는 모습에 다리부터 후들거린다. 지단이 멀미약이라며 태국에서 사온 약이라며 건넨다. 주위에 있던 나약한 인간들도 서로 달라며 손을 내민다. ‘아니 될 소리’ 돌아 올 때 먹을 약을 남겨두도록 지단님께 당부를 했다. 배는 말라카 해협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다. 불안감에 배 앞 쪽으로 나가니 승무원인지 보안요원인지는 모르지만 청년 두 명이 서 있었다. 비닐봉지 하나를 주라고 하니 왜냐고 묻는다. 배 멀미를 한다고 하자 쓰레기통 같은 통을 뒤지더니 비닐봉지 두장을 꺼내준다. 옆에 앉은 고박사에게 한 장 주고 본인은 눈을 감고 조용히 묵상 중이다. 지단의 약이 효과를 발휘하는 지 졸음이 몰려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해협 한 가운데를 지나자 제법 배가 요동을 친다. 어젯밤엔 적당히 음주를 한 탓인지 견딜 만했다. 배안은 온통 한국 사람들뿐이다.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해외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한국 사람들 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인 랄 수 있겠다. 옆자리에 앉은 강샘이 중년으로 보이는 경기도 아줌마들과 인사를 건네고 지단이 옆에서 작전에 들어간다. 1시간을 달려 배는 항구에 닿았다.

  항구에 닿으니 현지인 가이드가 나와 우리를 맞아 준다. 가이드는 강호동이라 했다. 얼굴이나 몸집을 보니 강호동과 닮았다. 20인승으로 보이는 미니 버스에 몸을 실었다. 부두에서 숙소로 이동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은 우리의 6,70년대와 비슷하다. 바탐 섬이 싱가폴과 인접한 관광지라 나름대로 개발 중에 있다고는 하나 서민들의 집은 낡은 슬래트 집이나 초라한 판자촌을 연상시키는 낙후된 집들이 더 많다. 저녁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유난히도 오토바이의 물결이 눈에 띈다. 이동 교통수단이 대부분이 오토바이인 모양이다. 차량사이를 오가는 오토바이 때문에 차들이 꽤나 곤혹을 치루는데 기사 아저씨는 아랑곳 하지 않고 갈 길을 서둘러 가고 있다. 저녁식사는 아리랑 식당이다. 건물 2층에 마련된 규모가 제법 큰 식당이다. 돼지고기 두루치기와 된장국이 나왔다. 김치는 젓갈이 없어서 인지 국적을 달리 했고 구미를  당기는 반찬이 별로 없다. 시장이 반찬이라. 키나 체구가 왜소한 여 종업원들이 서빙을 하는데 유독 한 아이가 얼굴도 반반하고 눈이 땡 그러니 손님들의 이목을 끈다. 어둠을 뒤로하고 호텔(GOLDEN VIEW HOTEL)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 후 짐을 풀고 내일 아침은 늦게 일어나도 된단다. 시간은 이곳이 싱가폴 보다 1시간이 더 늦은 시간이니 우리 시간 보다는 2시간이 늦다. 짐을 풀고 30분 후에 본부로 모이란다. 밤에 조촐한 파티가 12시 가까이 이어졌다. 물론 몇몇 올빼미 그룹은 야밤에 1층 호텔 바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그 다음 날 아침에 접했다.

  아침은 호텔 뷔페식으로 종류가 많지만 입에 찍어 넣을 음식은 그리 많질 않다. 텁텁한 입맛엔 단결력이 없는 쌀에 김치 몇 조각, 계란 프라이를 덮어 후딱 해치운다. 아침을 먹고 달려 간 곳은 중국 사원이다. 이곳 사원은 전통적인 불교사원이라기 보다는 남방식 불교로 도교와 혼합된 문화를 담고 있다. 각 사당 마다 모시는 신들이 다르다. 여기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을 모시는 사당도 있다. 관우의 지혜로운 정신을 기리는 의미에서 일까 보다. 중국사원을 라텍스 공장으로 향했다. 천연고무나무를 이용해서 침구류를 생산하여 판매하는 곳이다. 이동하면서 현지 가이드인 강호동이 요즈음 경제 상황에 대해서 하소연 비숫한 얘기를 했다. 성수기엔 한달에 12번 손님을 받다가 지금까지 2팀 만 받았다니 요즈음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 지를 실감한다고 했다. 라텍스 매장에 들어서니 조그마한 공간에 고무냄새가 제법 난다. 직원의 거침없는 제품의 효능과 효과는 일행들의 호주머니를 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캡틴 이하 대부분이 아내를 아끼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모두들 손에 라텍스 배게 한 꾸러미씩 들고 차에 오른다. 버스는 30여분을 달려 원주민 마을로 향한다. 입구에 유치원이 있는 작은 마을 어귀에 당도하니 코 흘리게 어린 꼬마들이 대~한 민국 짝짝짝 우리말을 한마디씩 한다. 우리를 졸졸 따라 다니며 우리말을 곧장 한다. 마음씨 착한 권단장님은 아이들 손에 달러 한 장씩을 꽂아 준다. 어찌도 저렇게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는지 절로 존경심이 살아난다. 야자나무가 숲을 이루고 원주민 가옥을 배경으로 사진을 여기저기서 박아본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환영 합니다’란 우리말로 무대를 장식하고 전통악기와 춤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이곳 민속춤 공연장은 중국이나 홍콩에서 보는 스케일이 큰 무대공연과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차이가 난다. 간단한 손동작 위주의 춤은 간단하고 더운 나라답게 빨리 끝난다. 이어 일행 몇몇과 무대 위에서 춤을 함께 추고는 사진 촬영 후 끝이 난다. 바로 옆에 원두커피 가루를 파는 가게에 들러 커피를 한통씩 사서 나왔다. 현지 가이드가 바나나 한 봉지를 들고 왔다. 일명 원숭이 바나나로 부르는 데 현지에서 맛보는 바나나의 맛이 새롭다. 코코아 주스에 목을 한껏 축이고 점심을 먹으로 수상 가옥 식당으로 갔다. 강호동의 주의 사항 중에 특이한 것은 밀물 때 화장실에 가지 말란다. 특히 남자들이 볼일을 볼 때는 물 속에 고기들이 거시기를 어찌 할 수도 있다는 우스게 소리다. 막상 도착하니 아늑한 호숫가에 자리 잡은 운치 있는 식당이다. 아참, 호수가 아니고 바다란다. 바로 옆에 여객선이 보인다. 내일 우리가 출발할 항구란다. 이곳에서 싱가폴까지 3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희소식이다. 점심으로 해물 요리가 나왔다. 게를 메콤하게 양념해서 무쳤는지 제법 양념이 듬뿍 발려져서 그런대로 괜찮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뒤로하고 오후엔 바닷가의 어느 원주민 마을로 갔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바탐 섬의 원주민 마을만을 돌아다니나 보다. 길옆에 펼쳐지는 판자촌을 따라 달리다 보니 한국 기업의 현지공장이 있었던 곳은 도로나 가옥들이 그런대로 쓸만했다. 해안을 따라 얼마를 달리자 어느 어촌 마을 이 나왔다. 한 청년이 다람쥐처럼 야자나무에 올라 사진을 찍어라고 포즈를 취한다. 이곳도 민속 마을이라는데 큰 구렁이를 목에 두르고 춤을 추는 여인과 그 옆에서 차력을 하는 청년들의 쇼를 본다. 한 청년이 입에 유리 조각을 한웅 큼 넣고는 꿀꺽 삼킨다. 지금까지의 공연과는 성격이 다른 조금 터프해 보이는 쇼다. 이곳에서 펼치는 쇼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규모의 쇼가 아니고 어떻게 보면 이들이 생업을 꾸리기 위해 장날에 나타나는 약장수나 차력사 같은 성격이라 봐야한다. 비단뱀처럼 생긴 큰 뱀을 몸에 두르고 사진 촬영에 들어갔다. 의외로 뱀의 피부는 매끈했다. 처음에 만져보고 뱀을 몸에 두르면 거부감이 덜 든다고 했다. 박혜정 샘은 기겁을 하고 끝내 뱀을 만지거나 가까이 가질 않았다. 

  숙소로 돌아 온 우리는 풀장으로 향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심상찮게 부는 것이 비라도 뿌릴 것 같다. 지단과 강성수 샘이 물로 들어 왔다. 캡틴과 주부장인도 수영장으로 나왔지만 물에는 들어오실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다. 스팀 앤 사우나 장에서 땀을 조금 빼니 한결 피로가 풀린다.

  저녁은 호텔 바로 인근에 있는 식당에서 해물 위주의 식사를 했다. 점심메뉴에서 보았던 게와 미나리 삶은 해물들이 나왔다. 조기 같은 마른 생선을 통째로 구운 생선 튀김도 나왔다. 식당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는 제법 규모가 크다. 처음 식당에 들어설 때부터 한국의 트롯 가요들이 흘러나온다. 강호동의 몸짓이 흥겹다. 대부분이 한국 관광객들이고 낯익은 사람들이 보인다. 한 쪽 귀퉁이에 외국인으로 보이는 일행들이 노래방 기계에 맞추어 팝송을 뽑아내고 있다. 8시까지는 무료로 노래를 해도 된단다. 흥이 났는지 그쪽 일행들이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식당을 나오니 캡틴께서 몸이 안 좋으신 지 감기약을 찾으신다. 오늘밤은 조용히 보낼 수 있으려나......

  우리가 밤에 시내로 나갔다. 별 소득 없이 호텔로 돌아 왔다. 돌아오는 길에 인근 야시장이 열리는 곳을 지나오게 되었다. 밤에 열리는 시장 치고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주로 우리내의 뻥튀기 같은 과자류와 잡화류, 생필품, 의류, 그리고 과일류가 거래되고 있으며 한 켠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주위에 낯선 눈빛들이 밤이 되니 더더욱 의심스럽다. 이러다 날치기라도 당할까 우리는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물건들이 조잡하고 눈길을 끄는 것들이 없었다. 호텔로 들어오니 10시 가량 되었다. 오늘이 바탐에서 마지막 밤이라 냉장고에 들어 있는 맥주와 술을 모두 비우기로 했다. 금방 맥주가 동이 나고 남은 소주까지 깨끗이 비우고는 12시 경에 모두 자기네들 방으로 되돌아갔다. 그 다음날 안 사실이지만 몸이 불편하시던 캡틴께서 밤에 다시 나머지 샘들을 소집하여 2층 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은 모양이다. 우리가 호텔로 들어오는 모습을 아무도 보질 못한 것이다. 새벽 한시까지 기다리다 방으로 가서야 시내로 나갔던 일행들이 벌써 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방문을 두드리자 벌써 잠이든 이들이 문을 열어 줄 리가 없다. 포기하고 다시 돌아온 권단장 대신에 캡틴께서 방문 앞에서 연기를 했던 것이다. “문 열어라 아이야...“라고 하니 자다가 벌떡 일어나 정한구 샘이 문을 열어 주자 냉장고에 소주를 내어 가지고는 사라지신 것이다.

  이튿날은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세면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와는 달리 아침엔 맑고 바람이 잔잔하다. 어제 점심을 먹었던 식당이 건너다보이는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올 때와는 달리 바탐에서 싱가폴까지 거의 직선으로 30분 정도 걸린다니 이만하면 배를 탈만하다. 배에 오르자 먼저 선상위로 올라갔다. 벌써 박승현, 이훈 샘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와 고박사 그리고 정박사가 뒤 늦게 자리를 했다. 배는 서서히 포구를 나와 한 바다 위를 거침없이 달려 나간다. 배의 속력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세찬 바람을 맞으며 벌써 말라카 해협의 가운데로 나선다. 대구에서 왔다는 아줌마 부대들이 시원한 바람에 머리 결을 나부끼며 난간을 잡고 버티고 있다. 또 다른 일행은 고령에서 왔다는 아줌마들인데 과도하게 차마를 날리자 뒤에서 지켜보던 일행 중 한명이 머플러를 벗어서 차마 아랫단에 묶어준다. 배는 포말을 남기며 거친 물살을 가르고 있다. 배를 타고 이처럼 주위 풍광에 도취한 적은 없다. 사방이 뻥 뚫어진 시선은 말라카 해협이 모든 선박들의 경유지란 사실을 실감하게 할 만큼 각종 선박들이 바다위에 한 점으로 떠있다. 수백 척의 화물선들이 마치 정박해 있는 배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움직이고 있었다. 바다 한 가운데서 맞은편은 싱가폴 뒤편은 인도네시아 바탐, 그리고 그 사이에 말레이시아, 3개국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거둔 성과란 바로 배 멀미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배 멀미를 말라카 해협의 거친 물살 속으로 던져 버렸다. 배는 30여분을 달려 항구에 닿았다.

  다시 입국 절차를 받으며 버스에 오른다. 싱가폴 가이드 위형준 부장의 인사를 받으며 시내로 향한다. 시내 도심에 있는 아시안 문명 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 들어가는 입구에 걸린 동양도 아닌 서양도 아닌 문명의 중심이라는 슬로건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싱가포르에 있는 국립 박물관은 세 개인데 그 중의 일부이다. 두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건물은 1910년대에 지어진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을 재건한 것으로, 주로 페라니칸의 역사, 문화, 생활상 등에 대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3층으로 된 두 번째 건물은 주로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이슬람 국가들의 문화유산들을 전시하고 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시내로 들어왔다. 스팀보트란 특이한 식사다 우리의 샤브 샤브와 비슷한 요리다. 신선로처럼 생긴 전골 솥에 해물과 육류를 넣어 익혀 먹는다. 의외로 맛이 깔끔하고 구미에 맞다. 점점 현지 음식에 입맛이 길들여지는 것이 여기서 생활해도 괜찮단다. 바탐에서 가이드 강호동이우리에게 말하기를 은퇴 후에 꼭 바탐에 와서 살란다. 왜냐하면 이 곳에 5억을 가져오면 이곳 현시가로 35억 상당액인데 이자가 13%이면 일년에 4억 5천 만원이다. 이자만으로도 한달에 밥 짓는 가정부 월 5만원, 청소하는 가정부 5만원, 생활 전반을 담당하는 가정부 10만원을 주면 된다. 나머지는 어디에 쓰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난 후에 센토사 섬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공원 셔틀 버스로 갈아타고 공원 위쪽 케이블카 타는 입구에서 내렸다. 곧 바로 머라이언 타워로 갔다. 엘리베이터로 12층까지 올라가니 사자머리 꼭대기다. 주위를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고는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가니 사자의 입이다. 사자 이빨을 사이에 두고 독사진을 한 장씩 서둘러 찍었다. 타워에서 나와 공원 내에 있는 민속 전시관을 둘러보고 다시 케이블카 타는 입구에 모여들었다. 마침 우리가 간 그날이 머라이언 공원 꽃 축제기간 마지막 날 이란다. 우리의 에버랜드 공원에 비할 수 없이 적은 규모지만 여기 현지인 들은 휴일을 맞아 가족, 연인, 친구, 여행객들로 붐빈다. 세계 어딜 가나 커피 전문점인 스타 벅스가 있듯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고 있다. 우리 일행들도 커피한잔에 여러 빨대로 목을 축이고 있다. 더디어 케이블카에 오를 시간이다. 최대 6명까지 한 칸에 오르는데 우리 칸엔 5명이 몸을 실었다. 부 웅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순식간에 공원의 나무 위를 지나 바다 위를 날아가고 있다. 백 미터는 훨씬 넘은 높이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홍콩에서 탔던 케이블카를 연상하게 했다. 그때도 산을 끼고 해안을 돌아 멀리 갔던 기억이 난다. 갑자기 케이블카가 공중에 멈추어 버렸다. 사고인지 이벤트 인지는 몰라도 꽤나 긴 시간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다행히 바다를 건너 보타닉 가든 위의 나무 위에 매달려 있다. 그런데 앞을 보니 아직 바다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중생들을 보니 위안이 된다. 다시 꺼억 하고 움직인다. 곧 바로 건너 편 목적지에 닿았다. 나중에 물어 보니 이벤트란다. 운행 중에 일정한 시간이 되면 한번씩 멈춘다고 한다. 안전을 위해서 그렇지 케이블카가 열 받으면 안 되니까 말이다. 멈추었을 때 가장 놀란 이는 중학교 주부장님이란다.

  이제 여행은 막바지에 이른다. 엊그제 사지 못했던 바틱을 구입하러 겔러리아 쇼핑센터를 찾았다. 2, 30분 만에 각자 한 두벌씩 들고 나온다. 이러다 바틱이 올여름 유행하는 패션이 되겠다. 시내 구경에 나섰다. 마산 부림시장을 연상하게 하는 크기의 시장 같다. 시장을 둘러보고 나오니 인력 자전거가 우리를 기다린다. 캡틴 자전거가 앞서고 그 뒤에 줄줄이 열을 지어 싱가폴 시내 중심을 돌아볼 예정이란다. 어둠이 내려앉는 황혼 무렵에 출발하여 시내 곳곳을 누빈다. 가이드가 귀 뜸하기를 오늘이 ‘우정의 날(Friend Day)’로 한달에 한번씩 인도 근로자(worker)들이 시내에서 친구들과 모이는 날이란다. 오늘하루 보게 되는 시꺼먼 아이들이 내가 평생 볼 수 있을 만큼 많은 수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출발하면서 빠빰빠밤빠 자건거 혼(경적)소리에 일제히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출발한다. 나와 고박사가 탄 인력거는 한국 가요인 이정현의 와를 시작으로 ‘설마 했던 네가 나를....’이란 경쾌한 리듬이 스피커의 굉음을 타고 흘러나온다. 어느 새 인력자전거가 도로의 한복판을 누비며 지나가자 차들이 옻나무 작대기 피하듯 피해 간다. 도로 가운데 한 차선을 점령하고 시내 곳곳을 누빈다. 인력자전거 기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는 가운데도 지나가는 건물 하나하나 설명한다. 회교사원 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시꺼먼 인도 출신의 워커들이 수십, 수백 명이 떼 지어 몰려나온다. 평생 볼 시꺼먼스(흑인)들을 여기서 다 볼 수 있었다. 어둠이 완전히 내린 가운데 종착지 선착장에 도착했다. 리버보트 키(Riverboat Quay)에서 야간 보트를 탄다고 한다. 강바람이 선선히 불어와 낮의 열기를 강물로 밀어내고 있었다. 도시의 야경을 구경삼아 리버 보트는 강줄기를 타고 지국총 지국총 흔들흔들 내려가기 시작한다. 한국어 방송이 나오고 있다. 발 빠른 임지단이 어느 새 배 후미로 나가 한국 아줌마들과 깔깔 소릴 지른다. 어딜 가나 빛(?)을 발하는 임지단의 입담이 국제적으로 입증이 된다. 리버 보트는 어둠을 가르며 화려한 싱가폴의 밤을 수놓으며 강나루의 조명을 비껴나가고 있다. 강변을 따라 펍(선술집)들이 길게 줄을 늘이고 그 안에 사람들이 한가로이 밤 문화를 즐기고 있다. 싱가폴은 인공을 가미한 도시지만 그 인공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꾸어 간다는 의미에서 이들이 앞으로 나가야할 자신들의 미래 삶의 방향을 잘 세기고 있는 것 같다. 다민족(중국계, 인도네시아계, 말레이시아계, 인도계), 다문화지만 이 나라가 추구하는 슬로건은 ‘한 민족, 한 국가, 하나의 싱가폴(One people, one nation, one Singapore!!)’을 외치고 있다. 보트 키에서 출발한 보트가 클락키를 거쳐 북 항까지 꽤나 긴 시간들이 흘렀다. 낮에 보았던 줄기차게 물을 내뿜는 멀라이언 상 앞에서 잠시 사진 촬영을 하고는 다시 배는 출발했던 보트키로 향했다.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면서 아쉽게 지나친 풍광들을 다시 주어 담으며 어느 덧 싱가폴에서의 마지막 밤이 종착지에 이른다. 이제는 공항으로 갈 시간이다. 아쉽지만 그래도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 가야한다. 3박 5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싱가폴에서 아무리 인공적으로 가꾸어진 도시라도 가꾸는 사람의 정성에 따라서 얼마든지 아름답게 표현 될 수 있다고 본다. 자원이 부족하여 인도네시아에서 물과 기름을 수입하지만 그 물과 기름을 다시 상품화하여 되파는 모습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소득 3만 불 국가가 경쟁력에서 뒤지지 않으려는 노력을 엿 볼 수 있다.

  싱가폴로 오기 전엔 법집행이 엄하고 까다로운 나라지만 그 나름대로 나라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고유한 색채를 지니는 나라라고 볼 수 있다. 그 일화를 보면, 1993년, 미국인 청소년 '마이클 페이(Michael Fay)'가 싱가포르에 와서는 20여대의 민간인 차량을 '장난삼아' 페인트 스프레이를 뿌려 파손하고, 교통표지판 등 여러 공공기물을 훼손하였다가 싱가포르 경찰에 체포되었다. 싱가포르 법원은 페이에게 징역형과 함께 태형[笞刑:곤장] 6대를 선고하였고,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온갖 압력을 행사하는 미국 정부의 움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 싱가포르는 마이클 페이에게 태형을 집행하여, 전 세계적으로도 많은 화제를 모았고, 또한 태형제도의 인권침해여부에 대한 논란도 불러일으켰다.

  호주의 한 청년은 마약을 운반하다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호주 정부와 국민들이 구원 활동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형을 집행해버려 국제적으로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이처럼 법이 엄하고 질서가 바로 잡힌 싱가폴이 아닌가. 내심 걱정도 되지만 좁은 땅덩어리와 자원하나 나지 않는 나라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하려면 그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동트는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이 정겹다.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오고 곧 착륙한다는 멘트와 함께 사뿐히 활주로에 내려앉다. 활기찬 서울의 역동적인 모습을 뒤로하고 짧디 짧은 여행이 마무리 되고 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무거운 발걸음을 집으로 내딛고 있다. 버스에서 내리자 집사람이 나를 낚아챈다. 수리가 물고기를 채듯 말이다.(끝)